프로 바둑 기사와 대국한 이야기

프로 바둑 기사와 대국한 이야기

2018, Dec 08    

벌써 오래전이다.

아직 학교를 다닐 때, 정확히는 제대 후 복학 학기의 수강신청 시기에 난 마지막 교양을 무엇을 들을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우리 학교 11학번들은 졸업요건으로 교양을 24학점을 채워야했는데 군대 가기 전까지 전공수업은 안 듣고 교양만 주구장창 들은 결과 교양이 단 2학점만 남은 것이었다. 그때가 4학기였던 것을 생각하면 이후에는 고난의 길이 기다리고 있었음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기존에 들은 22학점의 교양도 아쉽기는 마찬가지인데 필수 교양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교양수업은 과학수업을 들었기 때문이다. 지구과학, 상대성 이론, 천문학 등등. 과학수업 자체는 재미있었지만 과학만 들은 것은 다시 생각해도 아쉽다. 좀더 다양한 분야의 교양을 폭넓게 들어볼걸. 하지만 남은 하나의 교양을 높고 고민하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마지막 교양은 ‘바둑의 이론과 실제’라는 바둑수업을 신청했다. 왜 바둑 수업을 신청했을까? 어릴적 일본에 바둑 열풍을 불어왔다는 ‘고스트 바둑왕’을 읽어서인지, 동생이 바둑수업을 받는 것을 재미있게 봐서인지는 모르겠다. 왜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수강신청 전부터 바둑을 배우고 싶었고 제대 후 동네 기원을 갔다가 사장님한테서 ‘기본을 배우고 와라’고 쫓겨난 기억이 있다. 그래서 교양수업 편람에서 바둑수업을 보고 나방이 빛을 쫓듯 장바구니에 담고 결국 학교 마지막 교양을 바둑으로 마무리하게 되었다.


바둑 수업의 강사는 프로 바둑 기사이신 이다혜 사범님이었다. 실제 프로 기사와 와서 강의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못했는데 되게 신기했다. 그분은 프로 기사이면서 우리 학교 일본어과 동문이셔서 그 인연으로 바둑 수업을 하시지 않았나 싶다. 이다혜 사범님은 다방면의 활동을 많이 하시는 멋있는 분이셨다. 주업은 바둑 수업을 많이 하셨다. 대학교나 초등학교, 군대 등에 가서 바둑 수업을 많이 하신다고 했다. 그 외에도 간간히 방송에도 출연하셨는데 대표적으로는 tvN의 ‘지니어스 시즌 2’(2013)에 출연하시고 또 바둑을 빙자한 액션 영화 ‘신의 한 수’(2014, 감독 조범구)에서 이시영 손 대역으로 나오시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TV에서 뵌 것은 2016년 3월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에서였는데 참관인? 비슷하게 화면에 잡히신 게 생각이 난다. 이세돌이 몇 차전인가 지고 괴로워할 때 같이 대화하시기도 했다.

Photo with Professor Ms.Lee

주업이 교육이신 분이셔서인지 바둑 수업은 정말 재밌었다. 바둑의 역사, 우리나라 바둑 달인의 계보부터 시작해서 실제 바둑 기술 등 바둑과 관련된 폭넓은 주제의 내용들을 공부했다. 그중에서 팀 대결이 기억에 남는다. 한 주 2시간 수업에서 첫 1시간은 이론 수업을 하고 1시간은 팀 단위 리그전을 했다. 5명씩 한 조를 짜서 한 학기 동안 리그전을 펼치는 방식인데 그게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실제 ‘고스트 바둑왕’을 보면 팀 단위 대결을 많이 하는데 초등학생 때 보고 10년 뒤 그걸 내가 하고 있었다. 그 학기 수업들 중에서 바둑이 제일 재밌었고 언제나 그렇듯 시간은 정말 빨리 갔다.


난 수업을 정말 재밌게 들었고 배운 내용을 열심히 공부했다. 팀 리그에서 개인 성적도 몇 년이 지나 확실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난 이다혜 사범님과 대국을 해보고 싶었다. 순수하게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프로와 대결해서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하다가 기말고사를 앞둔 학기 말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 남아 사범님께 부탁을 드렸다. 사범님과 대국 한 번 하고 싶다고. 사범님은 생각보다 정말 흔쾌히 허락해주셨고 강의실은 다음 수업이 잡혀 있었기 때문에 우리 학교 바둑 동아리 부실로 향했다. 사범님은 학생 때 바둑 동아리도 하셨나보다. 아마 같은 학생보다는 선생님 역할을 하시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렇게 처음으로 바둑 동아리 부실에 들어갔다.

그때 어떤 남 학우 2명이 부실 한 편에서 대국 중이었는데 사범님과 친근하게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서로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아직도 기억나는 것이 그 두 학우의 말투가 상당히 뭐랄까… 고풍스러웠다. 뭐라 말이 딱 안 나오는데 바둑 두는 어르신들의 말투를 닮기도 하고. 그 형들 뭐하고 살까나. 바둑이라는 좋은 취미 잘 이어나가고 있으면 좋겠다.


본격적으로 대국을 위해 바둑판 앞에 앉았다. 사범님은 ‘몇 점 깔고 할까요?’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사범님이 핸디캡을 안고 하신다는 뜻이었다. 바둑에서는 각 플레이어가 한 턴에 한 수씩 두며 최종적으로 형성된 집의 수를 비교해 승부를 가른다. 그런데 서로 무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닌, 내가 몇 점 먼저 두고 시작한다는 것은 같은 실력일 때 집을 더 많이 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바둑을 ‘접바둑’이라고 한다. 하지만 난 정정당당하게 대국하고 싶었다. 이기는 것이 아닌 내 실력을 파악하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정정당당하게 ‘맞바둑’하자고 했다. 맞바둑은 접바둑의 반대말이다.

그렇게 대국은 시작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의 매 순간이 기억나지는 않는다. 워낙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초반부터 기세가 상당히 밀렸다는 것 정도. 내 표정은 사범님의 한 수 한수에 한층더 복합적으로 일그러져 가고 있었지만 사범님의 표정은 대국 내내 너무나 평온했다. 한 학기 동안 사범님께 많은 기술을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실제 대국에서 사범님은 처음 보는 행마를 계속 보여주셨다. ‘엉..?’ 이라는 혼잣말을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내게도 기회는 있었다. 여러 기술을 열심히 공부한 나는 ‘환격’의 기회를 포착했다. 환격(還擊)은 ‘돌아올 환’, ‘칠 격’ 한자를 써서 쉽게 말해 상대에게 미끼를 던져주고 그것을 계기로 크게 돌을 따먹는 기술이다. 다른 말로는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라고 할 수 있을까? 이 기술은 상대가 내가 던진 미끼를 물어야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상대가 나보다 실력이 아래여야 하는 점이 있다. 난 사범님께 미끼를 던졌고 최대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기 위해 마음을 다스리고 또 다스렸다. 그 순간만큼은 부처도 안절부절 못하는 중생의 모습이지 않을까.


그때 해주신 사범님의 말씀. “아, 환격하려구요??”. 난 당황했고 ‘아, 네…‘라고 대답했다. 아무리 프로 기사와 아마라고 하기도 민망한 학생의 대국일지라도 대국은 곧 대결이고 승부인데 자신의 수를 완전히 읽히고 또 그것을 인정하기까지 했다. 지금 생각해도 참 민망하고 헛웃음 나오는 일인데. 그 바로 직후 사범님이 해주신 말씀이 아직도 뇌리에 깊이 박혀 있다.


“내가 기회를 만들어야지, 상대가 실수하기를 바래서는 안 돼요.”


맞는 말이고 난 “넵, 알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며 마음속 깊이 인정했다. 이제는 기계도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래도 바둑은 사람이 한다. 그 짧은 대국에서도 일상의 교훈을 찾을 수가 있구나 싶다.


초반부터 승부는 결정나있었고 당연히 내가 패배했다. 패배한 사실보다도 몇 점차로 패배했는지가 중요한데 대국 동안 흑백이 서로 만든 집의 수를 세는 것을 ‘계가’(計家)라고 한다. 보통 프로들은 아무리 실력차가 나도 10집 차 내로 승부가 갈리는데 최근 중국의 프로기사 커제가 안국현 기사와의 2018 삼성화재배 월드마스터스 결정 3차전에서 5집반차로 우승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계가후

대국이 끝나고 사범님이 직접 계가를 해주셨는데 위 사진이 그 계가할 때의 장면이다. 저것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내 기억에 따르면 내가 320 여집차로 패배했는데 이는 어마어마한 패배로, 바둑판에는 가로, 세로에 19줄씩 있어 이론상 한 대국에 최대 361(19 X 19) 수를 둘 수 있다. 그런 바둑에서 320집차로 졌다는 것은 내가 한 수 둘 동안 사범님은 8수를 둔 것과 같다고 하겠다. 그때 난 그냥 어이가 없었다. 이게 뭔가 싶고. 그리고 ‘프로의 벽은 정말 높구나’ 싶었다. 물론 난 아마 수준도 안 되지만 그래도 알 수 있었다. 프로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하고.

위 사진을 찍을 때 사범님도 사진을 찍으시며 일반인과 맞바둑을 해보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라고 재미있어 하신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렇게 대국이 끝났고, 그 다음주 기말고사를 보고 한 학기도 끝났다. 그리고 이제는 학교 생활도 끝났다. 그래도 이 바둑 수업만큼은 아직도 기억에 남고 정말 좋았다. 이런 기억들 때문에 내 학교 생활이 완전한 실패는 아니구나 싶다. 더 많은 의미 있는 경험을 쌓아야겠다. 320여집 차로 지는 것은 이런 경험을 좀더 즐겁고 자극적으로 만들어주는 향신료 역할을 한다. 결과를 두려워하지 말고 정진해야겠지?

이상 포스트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