君の名は.
- 이 주제는 나를 오랫동안 괴롭혀오고 있는 주제이고, 세상의 많은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고 생각하는 의미있는 주제다. 향후 기호와 상징에 대한 공부와 자료조사를 더해서 반드시 사후(혹은 생전)에 출판을 목표로 하는 주제.
0. Index
1. 들어가며
‘너의 이름은’이라는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가 있다. ‘초속 5cm’ 등의 영화를 만든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제작한 영화로 우리나라에서만 360만 명, 일본에서는 1800만 명 이상이 본 영화다. 뻔한 남여 바디체인지 물이지만 신비롭고 재밌게 봤던 기억이 있다. 사실 한 6번은 본 것 같다.
이 영화에서는 남여 주인공이 일주일에 2~3번 꼴로 자고 일어나면 몸이 바뀌고 이러저러한 일이 진행되는데 이후 이 현상이 멈추고 서로에 대한 기억이 휘발되고 만다. 그렇게 서로에 대한 그 어떤 기억도 하지 못하고 공허감을 안고 살아가던 중 결국 막판에 서로를 만나고 눈물을 흘리며 끝이 난다. 이때 이 둘이 서로를 몇 년만에 처음 보고 동시에 외치는 마지막 대사는 다음과 같다.
君の名は?(너의 이름은?)
… 의문이 든다. 왜 이들은 서로의 주소, 혈액형, 직업, 핸드폰 번호, 이메일 주소, 주민등록번호 등을 묻지 않고 이름을 물었을까? 만약 겨우 만난 이들에게 단 한마디만 외치고 견우직녀마냥 또 헤어지게 한다고 했을 때, 이후 서로를 찾기 위해서는 이름을 묻는 것보다는 핸드폰 번호나 주민등록번호, line 계정 아이디를 묻는 게 더 현명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이들은 서로의 이름을 굳이 물어야했는가. 이름이 무엇이길래 둘 다 이런 선택을 했는가.
2. 이름의 기본적인 의미: 식별자
왜 하필 이름을 물었는지 이해하려면 먼저 이름
이 뭔지 알아야 한다. 이름이 뭘까? 가장 일반적인 의미의 이름은 사물이나 개념 등 각종 객체를 표현하는 식별자(identifier)를 뜻한다. 식별자, 그래 코딩에서 쓰는 그 식별자라고 해도 된다. 우리는 서로 다른 변수에 이름, 식별자를 할당해서 변수들을 구분하니까. 멀리 가지 말고 그냥 우리 사람 사는 세상을 보자. 개인의 이름은 서로를 타인과 구분하는 식별자의 역할을 한다.
이 식별자는 중요하다. 식별자는 기호로서 표현된다. 음성 기호와 함께 역사시대에 접어들면서 문자 기호가 병용되고 있다. 이 식별자가 없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객체들을 서로 다른 객체와 구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인간만 해도 지구에 70억이 넘게 사는데 이뿐만 아니라 화성, 중력장, 사랑, 유물론, 가위, 찰스 다윈, ‘아름답다’ 등의 무수히 많은 개념들은 적절한 이름없이는 서로 구분하기 어려웠을 것은 자명하다.
근데 이 식별자로서의 이름은 식별의 유효함만으로 작명되지 않는다. 무슨 말이냐면 이름의 식별성은 객체를 고유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기호를 사용할 수 있는지는 그것이 어떤 종류(class)의 객체인지와 사회문화적 통념, 관습에 따라 달라진다. 내가 결혼하고 자식의 이름을 ‘박어머니손맛청국장과그그리움’으로 짓고 출생신고까지 마친다면 많은 사람들이 날 비난할 것이다. 그러자 내가 ‘이 이름은 전 세계에 유일할 확률이 높아 객체 식별에 매우 유용한데?!’라고 항변해도 비난은 사그라들지 않을 것이다. 식별자는 인간이 사는 사회문화적 문맥, 제한이 끼어들어 사용가능한 발음이나 기호에 제한을 받게 되고, 결과적으로 이름의 고유성이 저해되는 것은 재미있는 사실이다. 학급에서나 직장에서 사람간 이름의 문자기호나 발음이 같거나 비슷해 둘을 구별하기 어려웠던 경험은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게 이름의 의미를 전부 설명하고 있나? 너무 공허해.
3. 이름의 다른 의미: 객체의 이미지와 정체성, 의미를 함축한 기호
이름을 단순히 식별자로 이해하면 맨 위의 질문에 대한 정확한 대답이 되지 않는다. 개인의 이름은 사회문화적 제약을 받기 때문에 온 우주에 고유하게 짓기 어렵다. 저 영화의 남주 이름이 ‘타키’인데 아마 일본에 ‘타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한 명뿐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엔딩에서 서로의 무언가를 물어볼 때, 이름은 진정으로 고유한 식별자가 아니기에 적절하지 않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제약에서 벗어나 이름을 온 우주에서 고유하게 지을 수 있다면, 가령 남주의 full name이 ‘니코니코니 아나타노 하토니 흑염룡 니코니코니 Junior 3세’였다면, 그리고 여주에게 이 이름을 말해줬다면 개인을 유일하게 식별해서 향후 서로를 찾기에 더 편했을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유는 모르겠으나 이름은 고유함과는 거리가 있고 그럼에도 이 둘은 서로의 이름을 물어야 했다. 그 이유가 난 너무 궁금하다.
다시 말해 이름을 식별자로서만 이해하는 것은 반쪽짜리 생각이다. 이름에는 보다 깊은 의미가 들어있다. 그리고 난 이름이란 ‘객체의 이미지와 정체성, 의미를 함축한 기호’라고 말할 생각이다.
사람들은 이야기하고 대화한다. 다르게 말하면 사람들은 어떤 사람, 사물 등 객체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며 이들의 이름을 언급해 대상을 공론화하고, 평가하고, 칭찬하고, 힐난하며 인식한다. 이름은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객체의 이미지나 인식을 짧게 표현하게 해준다. 가령 어느 두 사람이 나의 존재를 알 때 ‘그 사람 기억나? 자양동에서 태어나서 가주초등학교, 은천초등학교를 거쳐 묘곡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그 지역에서 15년 정도를 살다가 경영학을 전공하고 운좋게 컴퓨터를 공부해서 관련 분야를 공부하는 그 사람을 말이야! 그 사람이 글쎄…’ 라고 말하는 대신 ‘박성환이 글쎄…’라고 표현하면 소통의 비용이 매우 경제적이 된다. 그리고 개념 혼동도 생기지 않는다. 이름을 통해 이들은 한 대상을 정확히, 그리고 경제적으로 특정할 수 있다.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절약된 글자가 몇 글자냐 대체. 이름은 객체에 대한 인식을 표현하는 축약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때 내가 ‘객체를 표현하는’이 아닌 ‘객체의 인식 또는 이미지를 표현한다’고 적은 것은 이유가 있다. 우리는 보통 당사자가 되지 않는 이상 객체의 본질은 알지 못한다. 가령 내가 ‘화성’을 언급할 때 가본 적도 없는 그곳에 대해 당신과 소통하는 것인데, 객체를 정확하게 이해한 것이 아님에도 그 이미지 또는 그림자만으로 소통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위의 두 사람이 ‘박성환이 글쎄…‘라고 말할 때 이들이 나를 얼마나 알고 말하겠는가. 나도 나 자신을 온전히 모르는데 말이다.
사람은 객체에 대한 겉모습, 단편 기억, 이미지 혹은 하다못해 소문이나 전설, 신화를 통해 객체의 이미지를 나름대로 구축하고, 사회 속에서 이를 퍼뜨리며 서로의 객체에 대한 이미지를 동기화한다. 이 이미지는 곧잘 객체 당사자보다 크기가 커져서 사람들은 이 객체를 ‘잘 알고 있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객체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객체의 이미지, 정체성, 의미를 나름대로 만든다. 그리고, 이 거대해진 객체의 표상을 한 단어로 표현하는 것이 곧 이름
이 된다. 따라서 이름이란 본질적으로 함축적이다.
하지만 이름이 객체의 본질을 표현하는 것이 아닌, 객체의 평가된 이미지와 정체성을 표현한다고 해서 이름을 평가절하할 필요는 없다. 사실 어쩌면 우리는 객체들의 본질을 모두 알 필요는 없다. 내가 사랑하는 내 가족의 모든 것을 내가 다 알고 있나? 다 알아야 하나? 각자의 극히 개인적인 비밀과 사연 등을 정말 다 알아야 할까? 내가 찰스 다윈을 이야기할 때 전문가와 대화하는 것이 아닌 이상 ‘진화론의 아버지’ 정도로만 이야기해도 소통은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중요한 건 소통 가능성이다. 이름은 구별하기 위함이고, 구별은 궁극적으로 표현, 소통하기 위함이다. 공유하는 개념을 이름으로써 정확하게 집어 소통이 가능하기에 이름은 충분히 우리에게 중요하다.
잠깐만 딴 길로 새자. 이름은 함축적이기에 이름과 그것을 표현하는 기호는 자신이 표현하는 객체에 의해 상징을 갖고 또 이름 자신이 객체에 상징을 부여한다. 각 경우의 사례를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표현하는 객체의 상징성을 기호가 물려받는 경우는 euphemism treadmill
(완곡어법 트레드밀)이 있다. treadmill은 러닝머신의 미국 표현이고 계속 쳇바퀴 도는 것을 뜻한다. euphemism treadmill은 어떤 개념을 이름으로 정의했는데 이 이름이 개념에 의해 오염되어 다른 순화된 이름으로 갈아타게 되는 과정이 반복되는 것을 뜻한다. 당장 생각나는 사례는 ‘장애인’이 있다. 장애인은 단순히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가진 사람’을 뜻하는 단어로, 이 단어가 처음 생성될 때는 단순히 기호로서 이름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았다. 하지만 슬프게도, 나 어릴 때도 이런 경우를 많이 봤는데, 장애인들은 일상생활에서 어려움을 겪고 정상적인 경제활동이 어렵다보니 생활환경이 열악한 경우가 많다. 이렇게 생긴 부정적인 이미지가 장애인이라는 이름에 부착됐고 이 장애인은 장애가 없는 일반인을 모욕하는 단어로도 쓰였다. 나 어릴 때는 많이 봤다. 그래서 장애인이라는 이름 자체가 부정적인 의미를 갖게 되어 ‘장애우’라는 다른 이름이 생겼다. 요즘은 쓰이지 않는다. 왜 쓰이지 않을까 고민했는데 이 단어는 장애인들을 동정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을 반영해 장애인들도 싫어한다고 한다. 그래서일지 모른다.
다음으로 이름이 객체에 상징을 부여하는 사례도 풍부하다. 쉽게 말해서 적당한 백 들고 와서 Gucci 마크 붙이면 이 객체에 뭔가 부티나 경제적 여유, 고급스러움이라는 상징을 선사한다. 이 부여된 이미지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가성비 등은 따지지 않고 구매하게 되고, 미디어를 통해 이미지를 장악하려는 시도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이 현상과 관계가 깊다.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서 두 주인공이 서로의 이름을 물은 것은 사실, 단순히 식별자를 물은 것이 아니라 당신의 정체성과 의미, 어쩌면 본질을 물은 것이라고 난 말하고 싶다. 어떤 사람과 수많은 기억과 경험, 추억을 공유하면 그의 이름만 들어도 그에 대한 감상, 감정이 올라온다. 누군가는 이름으로 표현되며 그 이름에 그 사람의 이미지와 의미가 담기게 된다. 두 주인공들은 서로가 기억 저편 어딘가에 묵혀 둔 상대방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담아내 의식 위로 끌어올릴 그릇을 찾고 있고 그것이 곧 상대방의 이름인 것이다. 그래서 둘은 상대방의 이름을 물어야 했다.
마지막 문장 좀 마음에 드는데?
4. 우리 삶에 적용하기
그래서 이 이름에 대한 확장된 이해를 우리 삶에 적용한다고 하자. 뭘 할 수 있을까? 내가 개인적으로 잘 사용하고 있는 방법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공부하면서 익히게 되는 모든 개념의 이름을 쉽게 넘기지 말고 한 번 깊게 생각해보라.
그냥 쉽다. 공부를 하면 수많은 이름을 만나게 된다. 특히 개발 이야기를 해볼까? 내가 네트워크를 공부하면서 수많은 개념들을 만나는데 매우 많은 경우 이들은 영어 단어의 축약으로 표현되어 있다. HTTP, SSH, DHCP, FTP 등. 난 이 단어들을 보면 이것들을 반드시 풀어서 외운다. 이름에는 신기한 힘이 있다. SSH가 ‘Secure SHell’의 약자라는 것을 모르면 왜 ssh 프로토콜로 호스트에 접속했을 때 원격 쉘로 인터페이스가 표현되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 이해가 없다면 ‘ssh로 접속하면 아 그냥 그런가보다’하고 넘어가게 될 수 있다. 배우는 모든 단어는 반드시 이름을 풀어외워라. 한자 표현이면 한자를 반드시 찾아본다. 내가 가끔 알게 된 사람의 성이나 한자 이름의 한자를 물어보는 것은 그 사람의 가문을 알아보기 위함이 아니다. 물론 내가 안동 김씨 성의 친한 친구에게 ‘세도 가문의 후예로서 민족에게 사과하라’라고 하는 것이 장난임을 그 친구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그렇지? 꽃부리 영을 쓰는 친구야..)
그리고 사실 이름이 식별자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안다. 사람 이름을 돈 주고도 짓고, 기업이 기업 이름을 고심하며 개명하기도 하며, 통번역 시 단어를 여러 가능한 표현 중에서 신중하게 선택하는 것이 그렇지 않은가. 단지 이름의 의미라는 것을 고민하지 않았을 뿐이지.
만약 당신이 이 포스트에 조금이라도 흥미를 느꼈다면 기호와 상징에 대해 공부하고『장미의 이름』을 읽어보길 바란다. 이 책은 정말 뭔 말인지 모르겠더라.
5. 마치며
이 글은 몇 개월 전 회사 개인 글 공간에 idealization 해놓고 이번에 옮겨와 적는 것이다. 많이 다듬었지만 핵심 아이디어는 처음 적었을 때와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부터는 이번에 내가 좀 더 적어보게 되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니까.
나에게는 엄마, 아빠가 있다. 이것이 나의 한평생 동안 그들의 이름이었으며 이 이름은 나와 그들의 관계를 표현하는 단어이기도 했다. 이 관계는 나는 이 둘의 보호와 사랑을 받아야 하는 존재, 그것이 그들의 당연한 의무인 관계를 뜻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다. 이것은 나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생각이었다는 것을. 그들은 그들의 진짜 이름을 갖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에게도 이런 권리 없는 의무만 지고 있지 않았던 그들의 소녀, 소년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나의 노력 덕분만은 아니다. 두 분이 자신들의 진짜 이름을 희생하며 내 이름을 키워왔음을 나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아니, 나는 그들의 진짜 이름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사람들이 말하는 ‘겸손’이란 꼭 사회생활에서의 처세술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다.
이상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