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은퇴한 인도인 은행원과의 대화
0. 들어가며
정말 오랜만이다. 거의 한 달만인가? 양질의 컨텐츠를 생산하지 못했다. 작업과 공부를 안 한 것은 아닌데 그것을 블로그에 지식으로 승화시키지는 못했다. 무슨 말을 하든 결국 변명이다. 말은 가치가 없다. 하지만 작업을 다시 재개하자. 다시 달려볼 생각이다.
개발 관련 포스트 이전에 오래 묵혀 왔던 컨텐츠를 하나 꺼내볼까 한다. 난 지금으로부터 약 3년 전 채원과 혜민이라는 다른 친구와 한 달 동안 인도에 다녀왔었다. 그때 어느 은퇴한 부유한 인도인 은행원과 라다크 지방에서 30세 정도의 티벳 아주머니와 인도와 라다크에 대해 인터뷰를 한 기억이 있다. 이 컨텐츠는 사실 어떤 잡지에 출판될 수도 있었는데 결국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컨텐츠가 썩어가고 있었고 그게 못내 아쉬웠다. 그래서! 결국 이 기회에 두 편을 각각 포스트하려고 한다. 오타와 몇몇 정보 구조화를 제외하고는 3년 전 원문 그대로 올릴 생각이기 때문에 내 글 실력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가늠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 번 살펴보자.
1. 어느 은퇴한 인도인 은행원과의 대화
인도 시간으로 16일 19시 반, 인도 델리에서 마날리로 가는 버스를 타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채원과 혜민이 같이 앉게 되고 내가 혼자 앉았는데 내 옆에 어느 할아버지 분이 타게 되었다. 나는 처음에 피부도 하얗고 해서 유럽 사람인줄 알았는데 인도인이셨고 나름 엘리트에 속하는 분이었다. 그 분과 버스 타는 내내 이야기를 했고 나는 인도에 관한 많은 질문을 했다. 할아버지는 귀찮아하지 않으시고 성심성의껏 답변해 주셨고 나 혼자 알고 있기에는 너무 귀중한 인도에 관한 사실들이 많아 공유하고자 이 글을 남긴다. 글을 쓰는 날짜는 2016년 7월 17일이고, 내용에는 할아버지가 잘못 알고 있거나, 내가 잘못 이해했거나, 필요 이상의 의역이 있을 수 있어 어느 정도 가려서 읽어주셨으면 좋겠다. 또한 할아버지는 브라만 카스트이기 때문에 카스트에 관련한 질문에서 객관적이지 않으실 수도 있다. 이해하고 글을 읽어주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대화는 마구잡이로 난잡하게 흘러갔지만 글의 편의를 위해 인터뷰 형식을 차용했다는 것을 밝힌다. 100% 정확한 인도를 담고 있지는 못하겠지만 외국인인 나에게는 정말 귀중한 말씀이 많았다. 이 글을 할아버지께 바친다. 참고로 위 사진은 할아버지와 마날리행 버스에서 찍은 사진이다.
1.1. 인터뷰 전문
Q0
박성환(이하 ‘박’) : 할아버지, 소개 부탁드린다.
Sushil(이하 ‘S’) : 50년생 인도인이고 ‘Bank of India’에서 35년간 일하고 은퇴하여 지금은 연금 받고 생활하고 있는 평범한 노인이다. 이름은 Sushil Kumar라고 한다.
1.1.1. ‘인도’에 대해서
Q1.
박 : 인도인들이 인도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 있는지 궁금하다.
S : 내 생각에 인도인들은 자신이 인도인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다.
Q2.
박 : 인도의 발전에 있어 가장 큰 장애물, 방해요소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S : 너무 많은 인구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인도의 인구는 12억인데 너무 많아서 컨트롤할 수가 없다. 중국은 최근까지 산아제한정책을 펼쳐왔는데 인도는 그럴 수가 없다. 정부가 너무 힘이 없는 것이 문제이다. 스위스, 프랑스 등 서방 국가들은 인구가 줄고 있는데 오히려 인도는 인구가 늘고 있다.(multiply)
박 : 그럼 뚜렷한 해결책이 있는가?
S : 없다. 당장 생각나는 게 없다.
Q3.
박 : 알다시피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였다. 콜카타를 여행하던 중 1901년 빅토리아 여왕 사후 그녀를 기리기 위해 지은 빅토리아 메모리얼(Victoria Memorial)에 갔는데 그곳을 관광지라고 하고, 또 많이 찾기도 하는 인도인들이 너무 속 편한 게 아닌가 싶었다. 우리 대한민국은 일본의 식민지였는데 아직까지도 그 역사를 치욕이라고 생각한다. 인도인들의 생각은 어떤가?
S : 나는 1950년생으로 인도가 독립한 이후에 태어났다. 그 당시에 태어난 사람들은 그 처참한 시기를 아직도 기억하지만 그때 태어나지 않은 나와 현대의 사람들은 알 수가 없다.
Q4.
박 : 콜카타에서는 공산당이 30년 넘게 쭉 집권해왔다고 알고 있다. 그 이유를 나는, 콜카타 내에 많이 형성된 슬럼가 등에 공산당 주 정부가 전기나 물을 끊임없이 공급해주었고 그래서 슬럼가 주민들이 몰표를 해준 결과라고 들었다. 그것이 사실인가?
S : 정확히는 40년 이상이다. 그렇다. 대략 맞다. 콜카타 공산정권은 그들에게 일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어야 했다. 그렇지만 단순히 그들에게 돈만 주었다. 그 결과 콜카타 사람들은 자생력이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useless)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Q5.
박 : 최근에도 ‘Sati’(‘사티’ := 힌두교 전통에서 남편이 죽으면 과부가 된 미망인이 신부 화장과 차림을 하고 화장터에 같이 뛰어드는 것)가 진행되었는가?
S : 없다. 최근에는 없다.
Q6.
박 : 얼마 전 바라나시를 다녀왔다. 바라나시는 힌두교인의 최고 성지 중 하나인데 많은 사람들이 사후 그곳에서 화장되어지기를 바란다. 그래서 죽은 뒤 얼음으로 부패를 막거나 특별한 오일 마사지 등을 통해 부패를 막고, 먼 곳에서 시체를 운반해와서 화장을 하기도 한다고 들었는데 당신도 바라나시에서 화장되기를 바라는가?
S : 물론 바라나시에서 화장될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먼 곳에서는 어쩔 수 없다. 마날리에서 죽었는데 바라나시까지 시체를 운반할 수 없다. 말이 안 되지 않는가?
Q7.
박 : 인도 영화에 관한 질문을 하겠다. 인도 영화에는 영화 중간중간에 뮤지컬적 요소가 들어간다는 특징이 있다. 재미있을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극의 흐름을 방해할 수도 있는데 요즘은 어떠한가?
S : 그런 요소가 지나치면 영화 자체가 지루할 수 있다.(boring) 그래서 요즈음의 영화들에서는 그런 뮤지컬적 요소가 줄어드는 추세이다.
Q8.
박 : 책에서 인도는 지역이 너무 넓어서 국민 선거를 할 때에 인도 전체를 네 구역으로 나누어, 군대가 일주일씩 이동해 다니며 선거를 치른다고 들었다. 사실인가?
S : 그렇다. 옛날에는 폭력배들을(muscle man) 동원한 부정선거(bogus voting)가 정말 많았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런 것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Q9.
박 : 인도를 여행하면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친절하고 좋았지만 외국인 여행객을 바가지 씌우겠다는 신념으로 무장한 일부 상인들 때문에 힘들고 짜증도 많이 났다. 어떻게 생각하는지?
S : 그것도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일한만큼 공정하게 벌어야 한다. 그런데 너무 많은 인도인들이 모든 것을(everything) 원한다.
Q10.
박 : 인도에서 중산층은 한 달에 약 어느 정도의 벌이를 하는가?
S : 내 생각에 한 달에 약 1000달러 이상은 벌어야 중산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 같다.
박 : 그렇다면 바라나시와 콜카타에서 ‘Rickshaw’(이하 ‘릭샤’ := 인력거처럼 자전거로 사람을 운반하는 차량)를 많이 봤다. 릭샤 Wala(라이더)는 한 달에 대략 얼마나 벌까?
S : 글쎄.. 한 달에 한 250달러 정도 벌지 않을까 생각한다.
박 : 바라나시에서 릭샤를 탔는데 나 포함 총 3명에 짐까지 실은 릭샤를 한 명의 라이더가 몰았다. 너무 힘들어 보이던데…
S : 맞다. 그래서 나는 릭샤를 타지 않는다.
Q11.
박 : 인도 지폐를 보면서 흥미로웠던 것이 인도에서는 모든 지폐에는 간디가 그려져 있다. 대한민국은 화폐마다 인물이 다 다른데, 왜 인도 화폐는 모두 간디가 그려져 있는가?
S : 그것은 간디가 모두에게 존경받기 때문이다. 인도에는 수많은 세력과 사상이 다른 집단들이 존재했지만 간디는 사상, 종파를 초월하고 모두에게 존경받는다. 그만큼 간디는 인도인들에게 있어 중요하다.
1.1.2. ‘카스트’에 대해서
Q12.
박 : 본인은 카스트 제도에 관심이 많다. 인도 외에 많은 사람들은 카스트 제도를 부조리하고 비이성적인 시스템이라고 생각하는데 할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S : 생각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각자 자신의 카스트에 만족하면 그 어떤 문제도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나 상대방과 카스트로 인한 마찰이 생겨나면 그때부터 문제는 붉어진다.
Q13.
박 : 인도에서 요리사가 한 음식은 다른 사람이 먹어야 하므로 천한 출신의 카스트는 요리사를 할 수가 없고 보통 브라만 등의 높은 카스트가 요리사인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사실인가?
S : 그렇다. 사실이다.
Q14.
박 : 결혼에 있어서 아직까지도 같은 카스트끼리의 결혼만이 합당하고 인정된다고 들었다. 어떠한가?
S : 99%의 일반적인 경우는 아직도 그렇다. 그러나 나 같은 1%의 경우도 있다. 내 세 명의 딸들은 모두 미국에 있고 한 명은 MBA, 한 명은 포스트 닥터 과정에 있다. 그리고 각자 원하는 남편을 선택해서 결혼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는 카스트에 메여 있다.
Q15.
박 : 직장 선택에 있어 카스트로 인한 차별이 분명 있는가?
S : 아니라고 본다. 이제는 능력, 역량, 성품(personality)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게다가 정부기관의 경우에는 최소 40% 이상의 정원을 무조건 수드라 이하의 카스트에서 충원해야 한다.
Q16.
박 : 구직활동을 할 때 이력서에 본인의 카스트를 적어야 하는가?
S : 그렇다. 이름 칸에 적어야 한다. 내 공식적인 이름은 ‘Sushil Kumar Awasthi’이다. 이중 ‘Sushil’은 first name, ‘Kumar’은 last name이고 ‘Awasthi’는 surname으로 이것이 내 카스트 이름이다. 당연히 브라만, 수드라 카스트들 안에도 세부적인 서브 카스트들이 수없이 많고 이중 Awasthi는 브라만 중에서는 흔한 이름이다. 따라서 이름을 통해서 그 사람의 카스트를 알 수 있다.
Q17.
박 : 이런 대도시에서는 그렇다면, 본인의 카스트를 속이면서(cheat) 생활할 수 있지 않을까?
S : 불가능하다. 내가 낮은 카스트이고 높은 카스트라고 속이면서 생활한다고 가정할 때 그 누구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카스트가 얼굴에 보통 드러나기 때문이다. 낮은 카스트일수록 피부가 어둡다. 내 어머니도 매우 하얀 피부를 가지고 계셨다.(white complexion)
Q18.
박 : 만약 당신의 딸들이 낮은 카스트의 남자와 결혼한다고 찾아온다면 어떨까? 기분이 나쁘지 않을까?
S : 내 딸들은 모두 기독교인이다. 그런 것에 메여 있지도 않으며 나 또한 신은 곧 최종적으로는 하나라고 생각한다.
1.1.3. ‘본인’에 대해서
Q19.
박 : 은행에서 무엇을 하셨는지 궁금하다.
S : 은행에서 외환 관련 부문에서 일했다. 그래서 서울에 있는 은행과도 거래를 한 기억이 있다.
Q20.
박 : 난 직업을 가지고 있거나 가진 사람들에게 꼭 묻는 질문이 있다. 일을 하면서 자신에게 뿌듯한 순간이 언제였는지 궁금하다.
S : 어떤 직업이든, 어떤 일을 하든 뿌듯한 순간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자신이 목표로 한 일을 성취해 냈을 때 말이다. 그런 순간들에서 뿌듯했던 것 같다.
Q21.
박 : 세 딸이 모두 미국에 있다고 하셨는데 가끔 그리울 것 같다.
S : 뭐 그런 순간도 있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난 그렇게 딸들에게 집착하는(possessive) 아버지가 아니며 작년 8월부터 올해 2월까지 미국에서 딸들과 있었다.
Q22.
박 : 은퇴하고 어떻게 지내시는지?
S : 그것이 문제이다. 35년간 일하고 은퇴했는데 이제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내 아내는 영화를 본다든가, 친구집에서 밥을 먹는다든가 하는 뚜렷한 취미가 있는데 나는 그런 취미도 없는 것 같다. 단순히 시간을 버린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박 : 음.. 아직도 학생인 나에게는 난해한 질문이다. 내 생각엔 내가 하모니카를 배우고 싶은데 그런 악기 등을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여행을 다녀 보시는 것도……
S : 그렇다. 여행을 내년부터 더 많이 다녀볼 생각이다. 난 시골을 좋아한다.
1.1.4. 인터뷰를 마치며
할아버지와 더 많은 대화를 한 것 같은데 그때가 워낙 밤이었고 마침 인도 냉방병에 걸려 감기약을 먹고 매우 졸린 상태였다. 어쩌다 보니 서로 메일을 교환했는데 영화를 추천해주기로 했다. 그래서 난 할아버지의 고민과 맞닿아 있는 ‘Intern’을 추천해주려고 한다. 친구가 되기에 나이는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는데 난 할아버지가 내 좋은 친구가 아닌가 생각했다. 내가 종착역이었고 나보다 먼저 내리셨는데 더 많이 이야기 못한 것이 아쉽다. 이메일로나마 아쉬운 마음 더 달랠 수 있기를 바래본다.
2. 마치며
인터뷰 전문을 1번 장에 입력했다. 하이라이팅, 오타 수정 말고는 정말 3년 전 적었던 그대로이다. 재밌는 것을 많이 느낄 수 있다. 이 할아버지가 아무래도 카스트 최상위 계층이시다보니 카스트에 대해 별다른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계시고, 기득권답게 선심성 정책에 불만을 갖고 계시다. 그리고 은퇴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노후에 대한 인간다운 고민도 하시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결국 인간은 똑같다.
3년 전 정보이기 때문에 지금에 최적화된 정보는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간디에 대한 인도인의 존경이라든지, 카스트 할당제 등 재미있는 정보와 지식을 알고 가기에 이 인터뷰는 매우 성공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인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제 인터뷰가 도움이 될지, 많이 궁금합니다.
이상 포스트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