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견 - 견주 산책갈등론
해피에 대해서
우리 집에서는 ‘해피’라는 이름의 암컷 말티즈를 기르고 있다. 이제 5살 정도가 되었고, 내가 군대 가 있는 동안 나대신 집구석에 앉게 된 아이이다. 아빠가 어릴 때 집에서 기르던 강아지에 대한 그리움이 있으셨나 보다. 똑 닮은 작은 강아지에 이름도 어릴 때와 같이 ‘해피’라고 지으신 것을 보니. 난 사실 처음에 이 강아지에 대해 시큰둥했다. 지금와 마찬가지로 그때에도 가부장적이고 집안일에 철저히 관여 안 하는 아빠에게 불만이 있었는데, 난 아빠가 데려오는 것은 쉽게 하면서 반려견을 키우는 데에 따르는 비용(경제적 측면이 아닌 시간, 노력)에는 무관심할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집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는 분은 엄마이고 결국 모든 일은 엄마에게 전가될 것이라 판단했다.
내 판단은 크게 틀리지는 않았고 그때문에 난 처음에 그 친구에게 냉담해 했는데 이게 같이 살다보니 어쩔 수 없이 나도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해피가 우리 집에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 후는 어쩔 수 없었는데, 두 아들만 있는 집구석에서 부모님 두 분이 외로우셨나보다. 그렇게 해피를 좋아하시니까. 그래서 나도 이제는 해피와 원만히 잘 지낸다.
해피와는 일주일에 한 두번씩 산책을 한다. 여느 강아지와 마찬가지로 해피도 산책을 참 좋아하는데 한 번 산책을 나가면 최소 30분씩은 동네 아파트를 돈다. 양재대로 맞은 편의 롯데캐슬 쪽을 가기도 하고, 뒤편의 아이파크 쪽을 가기도 한다.
산책할 때는 목줄을 항상 채우고 이동한다. 아무래도 아파트 단지이기 때문에 로드킬의 위험이 있어서 산책할 때는 항상 목줄을 채운다. 목줄을 꺼낸다는 의미는 해피에게는 곧 산책을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목줄을 꺼내면 조건반사적으로 흥분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산책을 하면서 언제나는 아니지만 많은 산책에서 해피와 나의 이해관계가 상충된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이로 인해 생기는 갈등을 ‘반려견 - 견주 산책갈등론’이라고 이름지었다.
반려견 - 견주 산책갈등론
그냥 산책하는데 무슨 갈등까지 발생하냐고 할 수 있지만 산책 시에 나와 해피의 이해관계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면 그 가능성을 인정하게 된다. 일단 산책에 있어 산책의 시작과 끝은 언제나 해피와 내가 목줄을 사이에 두고 함께하기 때문에 산책에서 우리는 한 배를 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산책에서 이해관계는 서로 다르다.
해피로 할 것 같으면 우리 집 식구들이 게을러 산책을 자주 시키지 못하고 있다. 견종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강아지에는 적어도 주당 3회는 산책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온 식구 다해서(군대 간 정환이는 제외하고) 잘해야 일주일에 2번 정도만 산책을 시키는 것 같다. 이는 분명 바람직하지 않고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해피는 산책에 목마른 상태다.
난 반대로 해피처럼 산책에 목마른 상태는 아니다. 나도 상쾌하게 바람 쐬서 좋은 것은 맞지만 거의 매일 외출하는 나에게는 산책이 매우 고프다고 할 수 없다.
또한 강아지와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법이 다르다는 점에서도 이해관계 차가 발생한다. 바람의 느낌, 냄새와 같은 촉각, 후각도 영향을 미치겠지만,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시각을 이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개는 색맹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시각이 강력하지는 않다. 대신 개과는 후각이 인간에 비해 압도적으로 발달했는데, 이 친구들은 후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인간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 아이들이 후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는 어떤 느낌일까?’하는 생각을 해볼 수는 있지만 체험은 결코 할 수 없을 것이다.
산책을 하면서도 발생하는 갈등 또한 무시 못한다. 산책을 하면 항상 다니던 길을 가기 때문에 그런 길은 시각적으로 큰 변화가 없고, 난 빨리 지나치려고 한다. 하지만 그 길은 해피에게는 변화무쌍한 세계이다. 동네 다른 개들이 산책하면서 자신의 영역표시를 하는데, 이는 개에게는 매우 중요한 정보다. 그래서 해피는 시시각각 변하는 이곳 세계를 더 잘 살피기 위해 자신의 후각을 적극 활용한다. 그래서 난 해피가 냄새를 맡는 동안 기다려줘야 하는 입장에 처한다.
이렇게 견주와 반려견 사이에는 산책의 절박함 정도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둘의 이해관계는 다르다. 난 산책을 가급적 빨리 끝내고 싶어하고, 해피는 가급적 오래 산책하고 싶어한다. 이 갈등이 곧 ‘반려견 - 견주 산책갈등론’이다.
과연 이 갈등은 어떻게 표면화되고 있을지.
붉어지는 갈등
이 갈등상황는 몇 가지 표면적인 지표로 드러나게 된다.
먼저 목줄의 팽팽함 정도. 보통 상황에서 산책할 때 나와 해피는 보조를 맞춰서 걷고 그래서 목줄은 팽팽하지 않다. 서로가 서로의 의사를 목줄을 통해 어느 정도 파악 가능하고, 어떤 때는 서로의 의사에 맞게 양보하기도 한다. 하지만 해피가 반드시 훑어보고 싶은 장소가 있는데 나는 그냥 떠나고 싶을 때는 그 목줄이 팽팽해진다. 갈등상황이 직접적으로 표면화된 상황이다.
다음은 네 발로 꽉 버티는 해피. 해피는 이런 상황에서 ‘난 가지 않을 것이다’는 의사표시를 자신의 네 발을 딱 잡고 버티는 것으로 한다.
이런 갈등상황에서는 내가 양보해서 냄새를 맡게 하거나, 도무지 못하겠으면 끌고 가거나 안고 가거나 한다. 아무래도 견주 입장으로서 무조건 끌고 갈 수도 있겠으나, 앞서 말했듯이 해피에게 미안한 감정이 있기 때문에 많이 져주는 편이기는 하다.
그래서?
이 상황은 나와 해피에게 특수하게 적용되는 갈등론이다. 주인에 따라서는 강아지가 가는 모든 발걸음을 따라 걷는 것이 행복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반대로 주인이 가는 곳 그곳이 곧 내 새로운 안식처인 강아지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난 견주로서 그렇게 자애롭지 않거나, 해피도 욕심이 많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면 혹자는 ‘이런 너의 특수한 사례가 무슨 의미가 있을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을 충분히 할 수 있다. 나는 이 사례에서 이런 통찰을 느꼈다.
- 갈등은 종을 초월한다.
- 갈등 당사자인 나와 해피는 생물종이 다르다. 아마 공유하는 조상도 꽤나 오래 전일 것 같다. 그럼에도 우리는 갈등상황을 겪고 있다. 이는 갈등이 생물종의 차이를 초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이는 당연한 예로, 포식자와 피식자의 이해관계는 완전히 상충관계다. 다만 이번에는 그보다 사소한 사례에서 이 사실을 확인했다.
- 아무리 사이가 가까워도 갈등은 충분히 발생할 수 있다.
- 해피와 나는 종이 다를지언정 같이 사는 가족이다. 하지만 가족이라도, 아무리 가깝더라도 이해관계는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갈등은 충분히 발생할 수 있다. 명심하자. 생물개체는 이기적이다. 이기적이지 않으면 생존하지 못했다.
- 향후 생명체와 비생명체 간의 갈등이 존재할 것인가?
- 해피와 나 사이에는 최소한 생명체라는 공통점이 존재했다. AI 등 로봇 개발이 미친듯이 이루어지고 있는 요즘, 나중에 생명체와 로봇과 같은 비생명체간의 갈등은 발생할 것인가? 내 예측은 ‘발생한다’이다. 관계나 사이가 가까워도 갈등이 발생하는데 이렇게 확연히 구조적인 차이가 존재한다면 이는 필연적 아닐까? 다만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터 패스트(2014, 브라이언 싱어)’에서처럼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상황이 나오지 않게 조심해야 할뿐…
이상 반려견 - 견주 산책갈등론 포스트를 마친다.